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단 편집) == 북베트남 군대와 베트콩들의 문제 == 월맹과 베트콩들도 양민이나 포로학살에 대해 깨끗하지 못했다. 베트콩 경우는 "공포 정책"을 실행하며 친미/친정부 마을에서 인민재판이나 학살을 벌인적도 있으며 구정공세 당시 월남 고위간부나 군경의 가족들을 몰살하고 다녔다. [[https://en.wikipedia.org/wiki/Execution_of_Nguy%E1%BB%85n_V%C4%83n_L%C3%A9m#/media/File:Execution_of_Nguy%E1%BB%85n_V%C4%83n_L%C3%A9m.jpg|관련 사진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진일 것이다.]][* 보기에는 남베트남 경찰의 양민학살 같으나 진실은 반대다.[[http://storyberry.egloos.com/tag/%EC%9C%84%EC%97%94%EC%98%A5%EB%A1%9C%EC%95%88/page/1|#]]] 남베트남 도시인 '[[후에]]'의 경우는 베트콩들과 월맹군(북베트남군)에게 장악당한후 수천명의 포로들, 민간인들이 고문이나 [[강간]] 당한후 학살당했고 또 수천명이 강제 월북당했다. 현재 베트남 정부는 이 사건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숫자를 축소시키고 있어 해외 망명한 베트남인들에게서 진실규명을 요구받고 있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저지른 이 [[후에 대학살]]은 베트남 전쟁 최악의 학살이었으며 학살 당한 숫자가 수천명으로 자릿수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미군이 저지른 [[미라이 학살]]도 피해자는 수백명으로 [[후에 대학살]]에 비하면 약과다. 학살 사건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먼저 나서고 오히려 베트남 정부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이런 깨끗하지 못함에 기인한다. 현 베트남 정부가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못하는 것은 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 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참고로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하기 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북베트남의 공포심 활용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도덕성 역시 훼손되기에 함부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